1. 왜란을 예견하고 목숨 걸고 직언한 조헌
중봉 조헌(1544~1592)은 강직한 성품으로 임금에게 거리낌 없이 직언했던 선비였다. 율곡 이이는 그의 재능과 뜻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지나치게 강직하고 성급한 성품을 경계했다.
조헌은 24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토정 이지함과 우계 성혼을 거쳐 율곡 이이를 스승으로 모셨다. 율곡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지으며 스승의 뜻을 계승하고자 했다.
당시 당쟁에 휘말려 여러 차례 파직과 유배를 겪었지만 조헌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율곡을 모함하는 세력을 비판하며 상소를 올렸고, 이후에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하며 국방을 강화할 것을 거듭 주장했다.
1589년에는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엎드려 상소했다. 이를 ‘지부상소(持斧上疏)’라 하는데,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쳐달라는 뜻이었다. 목숨을 걸고 나라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던 조헌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다.
2. 학문과 실천을 중시한 ‘행동하는 선비’
조헌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글 읽기에 몰두했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직접 농사를 짓고 땔나무를 하면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성균관에 들어간 뒤에는 당시 불교계의 문제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임금의 답변이 없는데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후 율곡과 성혼에게 배우며 학문과 정치에 대한 뜻을 더욱 키웠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에는 중국의 제도를 살펴 조선의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리의 사치와 행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인재 등용, 군사제도, 교육과 풍속 등 다양한 분야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의 개혁사상의 중심에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안민(安民)과 백성을 위하는 위민(爲民)이 있었다. 후대 실학자 박제가도 조헌의 삶과 사상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존경했다.
3. 김포 우저서원, 조헌의 삶을 기억하다
조헌이 태어나고 자란 김포에는 그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는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있다. 서원은 조헌의 출생지 인근에 자리하며, 이름은 물가에 소가 누워 있는 듯한 지형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서원 뒤편에는 조헌의 위패를 모신 문열사(文烈祠)가 있다. 우저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서원 한쪽에는 1617년에 세워진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도 남아 있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헌과 그의 아들, 그리고 700여 의병이 금산 전투에서 순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저서원은 조헌의 학문뿐 아니라 나라를 위해 행동했던 그의 정신을 기억하게 하는 공간이다.
4.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대비를 촉구하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했다. 1587년 일본 사신이 조선의 국력을 살피기 위해 찾아오자 조헌은 이들을 배척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1591년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하자 다시 상경했다. 그는 일본 사신 겐소의 목을 베고 군사를 정비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정은 그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헌은 궁궐 앞에서 사흘을 기다렸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고, 주춧돌에 머리를 부딪쳐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호소했다.
결국 조헌은 옥천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5. 의병장이 되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쟁이 일어나자 조헌은 “이제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며 탄식했다. 평소 자신이 주장했던 국방 대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곧바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가 전국에 격문을 보내자 1,600여 명의 의사가 모여들었다. 조헌은 승장 영규와 함께 청주로 진격해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을 되찾았다.
이후 금산의 왜적이 호남을 공격하려 하자 금산을 먼저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관군의 방해로 병력이 700여 명으로 줄었고, 상대는 1만5,000명에 달했지만 조헌은 금산 공격을 결심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의병들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조헌과 700여 의병은 모두 전사했지만 왜군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금산 전투의 희생은 호남으로 향하는 왜군의 진격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음 날 발견된 조헌의 시신 주변에는 그의 장수와 병사들이 빙 둘러 죽어 있었다고 전한다. ‘의(義)’ 깃발 아래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것이다.
6. 조헌이 남긴 ‘위민’의 개혁정신
조헌은 단순한 관료나 학자가 아니라 실천을 중시한 유학자였다. 그의 개혁사상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명나라를 다녀온 뒤 올린 동환봉사(東還封事)에는 그의 개혁 구상이 집약되어 있다. 관리의 임용과 인사제도 개선, 사치와 낭비의 절약, 향촌 풍속 개선, 문무를 겸비한 인재 양성 등이 담겼다.
또한 임금에게 스스로 수양하고 반성할 것, 바른말을 받아들일 것, 신분이나 문벌보다 인재의 능력을 중시할 것 등을 요구했다.
군사 분야에서도 노비를 포함한 인재를 군사로 선발하고 군대 훈련과 성곽을 강화하는 등 구체적인 국방개혁을 주장했다.
조헌의 삶은 말로만 나라를 걱정한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옮긴 ‘행동하는 선비’의 본보기로 평가된다.

[출처]월간중앙 :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35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