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저서원은 중봉 조헌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조헌이 살던 집터에 세워진 것이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군에 맞선 의병장이다. 왜란이 일어날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봉은 “오직 의(義) 한 자만을 끝까지 생각하라.”라는 말로 의병들을 설득해 한 사람도 도주하지 않고 싸움에 임하도록 이끌었고 그 역시 ‘오직 의’를 위해 싸우다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우저서원은 중봉 조헌(趙憲)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1648년(인조 26) 지역의 유림이 조헌이 살던 옛 집터에 세운 서원이었다. 조헌은 1592년 왜군이 쳐들어오자 의병을 모집해 항전하다가 금산전투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시 의병은 전국에서 일어났는데 선비들뿐 아니라 승려와 일반 백성들도 무기를 들고 왜군에 맞서 싸웠다. 관군도 아니면서 전투에 나가는 이들에게는 용기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바로 ‘의’였다. 조헌은 ‘의’를 위해 모인 의병들을 이끈 의병장이었다.

김포우저서원
중봉 조헌(趙憲, 1544∼1592)은 1567년 병과에 급제한 후 두루 관직을 거치다가 1587년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옥천군 안읍밤티에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은둔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청주성을 공격해 탈환하였다. 승병장 영규(靈圭, ?~1592)가 이끄는 승군(僧軍)이 함께 공략해 이뤄낸 성과였다. 이어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모두 전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금산전투이다. 금산전투를 승리로 이끈 의병장이 아님에도 중봉 조헌이 배향될 수 있었던 이유는, 승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의를 위한 싸움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조헌은 금산전투에 나가는 마지막 훈령에서 “오늘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고 살고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 의(義)라는 한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고 외치며 700명의 의병을 이끌었다. 조언은 의병들에게 작은 이익을 탐하지 말고 오직 ‘의’를 생각하며 물러나지 말 것을 의병들에게 호소하였다. 「호군서사(犒軍誓詞)」에는 의병들을 지휘한 조헌의 훈령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대오를 잃지 말고 자리를 떠나지 말라. 남을 침해하지 말고 적병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군령만을 생각하고 국난을 생각하고 진격만을 생각하라. 감히 물러나지 말고 오직 큰 적군을 죽이며 작은 이익을 탐하지 말고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면 마침내 공훈을 있을 것이나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지 않으면 벌이 있고 후회가 있을 것이다. 오직 의(義) 한 자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하라.
「호군서사(犒軍誓詞)」


'의' 하나만 생각한 의병
중봉의 의리 사상에 감화한 700명의 의병은 단 한 사람도 도주하지 않고 중봉과 함께 마지막까지 싸우다 모두 순절하였다.
그들도 오직 ‘의’만 생각하며 죽음을 불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s://ncms.nculture.org/confucianism/story/2625